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덴노 (문단 편집) == 성격과 특징 == * 의외로 서양 문물에 부정적이었다.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특히 교육에선 유학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서구식 학제를 도입하려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가 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2개월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즉 최종 승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적절한 설득으로 [[입헌군주제]] 등에 반대하진 않게 되었고, 1886년부터는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허락했다. 대신 그의 이런 성향은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같은 봉건적인 요소가 가득한 표어들을 만드는 데 영향을 크게 미쳤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일본 개방의 중심이었던 사쓰마, 조슈 무사단의 성향 자체가 보수 개혁파였기 때문이지만. 아들인 [[다이쇼 덴노]]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서양 문물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는 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학습에는 열중했는데, 메이지 덴노는 이런 아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상당했다.[* 이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메이지 덴노는 주걱턱을 갖고 있었고 그 턱에 [[천연두]] 자국까지 있어서 본인의 외모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다보니 미화된 초상화를 더 좋아하여 사진도 미화된 초상화를 찍어서 배포할 정도로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래서인지 자기 자식들조차 잘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들의 혼인날 처음 만났다는 농담 같은 야사도 있다. 손자들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는데 그들이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면 군복 차림으로 앉아 고개를 끄덕인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식들도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 [[승마]][* 처음 말을 탔을 때는 벌벌 떨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와 [[와카]]를 좋아했고, 100,000여 수의 시가를 남겼다. 또 [[도검]] 애호가로 여러 명검을 수집했으며, 그중 일부는 현재 도쿄 국립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실제로 [[야마다 아사에몬]]이 바친 [[일본도]]인 [[코류 카게미츠]]를 패용했다고 한다.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 남조 요시노 조정(다이카쿠지 황통)의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으로 전해지는 물건이었는데, 마사시게가 일본 제국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활용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인 상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생전에 여자와 유흥을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그의 아들인 [[다이쇼 덴노]]와 장손인 [[쇼와 덴노]]는 황후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다이쇼 덴노]]의 아내인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아들을 4명이나 낳아 후사 문제가 없었으나, [[쇼와 덴노]]의 아내였던 [[고준 황후]](나가코)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았다. 그래서 데이메이 황후는 며느리가 딸만 낳는 못난 여자라고 매서운 시집살이를 시켰으며 주위에서도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하여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추천하기까지 했으나, [[쇼와 덴노]]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고준 황후가 어렵게 두 [[아키히토|아]][[마사히토|들]]을 낳고서야 후궁 이야기는 수그러들었다. 훗날 고준 황후는 본인이 시집살이당했던 것 이상으로 재벌 가문 출신의 며느리였던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치코 황후는 [[나루히토]]와 [[후미히토]]를 먼저 낳은 덕에 아들 문제로 혼날 일은 없었다.] 또한 식욕이 대단하여 [[대식가]]인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비대해졌고 결국 당뇨병에 걸리게 되었다. * 아들인 [[다이쇼 덴노]]가 어렸을 때, 그의 건강 상태나 수업 진도를 확인하는 등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경솔한 말버릇을 질책했고, 거의 만나지도 않았으며 종종 만날 때도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다이쇼 덴노도 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를 불편하게 여겼고,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이쇼 덴노는 결혼했을 때 자녀들과 자주 놀아주며 애정을 많이 주는 좋은 아버지가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 메이지 덴노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메이지 천황기》가 있다. 쉽게 말하면 그의 실록인 셈인데, 1914년에 처음 편찬할 때는 우리가 아는 실록대로 그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천황의 언행 등을 기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부총재였던 가네코가 이에 반대하여 1920년, 다이쇼 덴노의 재가를 받아 메이지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193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뒤인 1933년에 <본기> 250권, <화권> 1권으로 완성되어 쇼와 덴노에게 봉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